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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Insight!

침묵하는 것이 제일 힘들다

[정용민의 미디어 트레이닝]

기업&미디어 web@biznmedia.com


오랜만에 마케팅과 영업 핵심팀장들이 팀장회식을 마련했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아주 긍정적인 매출기록을 연이어 달성하면서 회사 내부 사기가 높다. 특히 영업팀장들이 그 동안 고생해 준 홍보팀의 노고에 감사하기 위해 홍보팀 홍팀장을 대표로 불러 술을 한잔 사기로 했다.

거의 매일 기자들과 기울이던 술잔을 회사 동료들과 기울이는 기회가 되어 홍팀장은 간만에 회식이 설레인다. 지금까지 영업과 마케팅 쪽에서 가지고 있던 사소한 오해들과 불평들도 이 기회를 통해 시원하게 해소하고 팀워크를 다져야겠다 생각한다.

일찌감치 업무를 마치고 회식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한남대교 위에서 강남으로 향하고 있는데 사장님으로부터 휴대전화가 온다. "홍팀장, 어디야?" "네, 사장님, 오늘 팀장들 회식이 있어서 회식 장소로 일찍 이동하고 있습니다." "흠, 그래? 급한 일이 있으니 차를 돌리세요. 본사에서 오신 분들과 OOO 빌딩에 있으니 그쪽으로 오세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그 분들이 이 시간에 왜 거기 가 있을까? 홍팀장은 이번 회식의 호스트들인 영업 상무와 마케팅 상무에게 사장님을 팔아 양해를 구했다. 다들 "무슨 일이야? 사장님께서 직접?"하고 고개들을 갸우뚱한다.

홍팀장이 OOO 빌딩에 들어섰다. "30층으로 오세요" 홍팀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30층에서 내리니 아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된 회사다. 리셉셔니스트가 보인다. '어떻게 오셨지요?" "저…OOOO에서 왔습니다. 저희 사장님께서 여기 계신다고요." "네..이리로 오세요" 훌륭하게 차려 입은 리셉셔니스트가 길을 안내하고 큰 회의실 문을 열어준다.

회의실에 들어서니 이미 거기에는 본사 핵심 임원들 몇과 사장님이 앉아 계시다. 또 처음 보는 와이셔츠 차림의 사람들이 여럿 앉아서 수북이 서류들을 쌓아 놓고 바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로 그들이 컨설턴트들이거나 은행 쪽 사람들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우선 임조심하고…”
사장님께서 홍팀장을 소개하고, 홍팀장은 각자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눈인사를 나눈다. 홍팀장이 사장 옆에 앉는다. "사장님, 저를 부르신 이유가?" "어…홍팀장, 본사 차원의 큰 이슈가 있어요. 오늘 한번 들어보고 이와 관련해서 홍보팀 쪽에서 메시지 관리들을 좀 해줘야 할 것 같아" "네? 이슈라면…?" 사장님은 "우선 입 조심하고, 일단 회의 내용을 잘 듣고 판단해요"하신다.

   
 

 

이윽고 회의가 시작됐다. 저 멀리 태평양 건너 본사에서 컨퍼런스 콜로 여럿이 들어온다. 빠른 영어로 여럿이서 서로 지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통에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린다. 같은 회의실에 있는 컨설턴트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속사포처럼 영어로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사장님도 본사 임원들에게 정신없이 설명을 하고 설명을 들으신다. 홍팀장의 짧은 영어실력으로 들어보니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를 인수한다"고 하는 것 같다. 어떤 회사인지는 모든 사람들이 Rat(쥐)라는 암호를 쓴다. '무슨 소리야…쥐를 잡겠다는 소리는 아닐 테고…' 홍팀장은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본사 커뮤니케이션 임원이 컨퍼런스 콜에 들어와서 크게 설명을 한다. "홍, 너 거기 있니?" "응, 나 여기 있다." "오케이. 네가 이제부터 할 일을 알려줄게. 너와 너의 팀은 이제부터 모니터링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해. 이번 Rat을 잡기 위한 모든 이슈들에 대해서는 네가 코멘트 할 수 없어. 기자들이 물어보면 나에게 연결시켜줘. 그들이 영어를 하는지 못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할 일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것이야. 실시간으로 기자들로부터 어떤 질문들이 있었는지 나에게 보고해 줘. 이메일도 좋고, 메신저도 좋아, 전화를 걸 수도 있어. 아무튼 Rat에 관련해서는 절대 답변하지마, 너에게 공식적인 답변문을 주기까지는 아무런 예측도 너는 할 수 없어. 알겠지?" 홍팀장은 짧게 대답했다. "응"

하지만, 홍팀장은 혼자 생각을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나를 여기까지 부른 거야? 그건 그렇고 이 Rat이란 게 어떤 회사야?" 생각을 해 봐도 M&A 할만한 대상이 없다. 같은 업계 시장에 나와 있는 매물로도 마땅한 회사가 없어 보인다… 에잇.

다음날, 괜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음만 무거워진 홍팀장은 여기 저기 정보 서치를 해 본다. 주식시장에 떠 다니는 찌라시들도 검토 해보고, M&A 관련 기사들을 서치 해 본다. 답이 안 나온다. 어느 회사일까? 어제 과음에 취한듯한 목소리로 마케팅팀장이 전화를 했다. "어이 홍팀장님, 어제 사장님이랑 재미있었어?" "무슨…재미는…" "사장이 뭐래? 뭐 승진이라도 시켜준대? 홍보임원 되나?" "에이…실 없는 소리. 아무것도 아냐 끊어" 할말이 없다. 사장이 왜 불렀고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도.

홍보팀 조과장이 다가와서 묻는다. "어제 사장님 미팅 하셨다면서요?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요? 모니터링 범위를 이렇게 늘리신 것도 그렇고…" "아냐. 그냥 본사에서 모니터링 좀 잘하라고 몇 마디 하더라고…그냥 애들한테 모니터링 놓치지 말고 하라 그래. 이상 있으면 당신이 정리해서 실시간으로 내게 보고하고"

프로에게‘비밀준수’는 가장 기본적

   
 

 
역시나 눈치와 정보력이 앞서는 영업팀장들이 전화를 걸어온다. "홍팀장, 어제 사장님 만나서 무슨 이야기 있었어?" "아냐…아무것도" "들리는 설로는 우리회사가 OOO마트를 산다던데 그 얘긴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돼." "아니…그냥 시장에 들리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지" "자꾸 헛소리 하다가 사장님 귀에 들어가면 큰일나니까 말 조심해" "뭐야…맞는다는 거야? 아니야?" "몰라, 어제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어……끊어" 홍팀장은 깜짝 놀랐다. "아…그 Rat이라는 게 OOO마트구나. 그렇구나……"

여의도에서 애널리스트로 성공한 친구 하나가 오랜만에 전화를 해온다. "어이 홍팀장, 잘 지내? 당신네 회사 좋은 소리가 들려. 그거 들었지?" "뭐…뭔 소리?" "아니 홍보팀장이 아직 그 정보도 모르나? 이거 애널들한테도 거의 알려졌는데……오늘 아침에 입수한 따끈한 정보야. 아무튼 자네 OOO마트 주식을 좀 사 둬. 괜찮을 거야. 후후후" 홍팀장은 고민한다. '완전 이건 유혹이군' 집에서 힘들게 아이들 키우면서 지쳐 하는 와이프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아니야…그러면 안돼…'

하루종일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업무를 마감한 홍팀장은 정해진 약속대로 OO 경제지 출입 기자와 저녁을 한다. 아구찜을 앞에다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기자가 묻는다. "OOO마트 쪽에서 그러는데…여기저기 입질들이 온다더구먼. 홍팀장네 업계에서도 몇 개 회사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던데? 홍팀장네 회사는 어때? 본사 쪽에서 연락 없나?" 홍팀장 목에 술이 꺽 하고 막힌다. "켁켁…켁켁…에이 나이가 먹으니 사래가 잘 걸려…켁켁…"

홍보일을 하면서 사실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에게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기분이 좋다는 것을 깨닫는 것 처럼…차라리 말해 버리는 게 더 편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또 조직인으로서 홍보인은 개인이 아니다. 회사를 대표하는 공식적인 창구다. 비밀 준수는 프로페셔널로서 홍보인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주문이다.

특히 M&A라는 이슈에 접해서 홍보인들은 윤리적인 문제, 관계의 문제, 비밀준수의 문제, 개인적인 갈등과 같은 여러 경험들을 하게 된다. 흔히들 이 과정에서 전략적인 포지션이 관계를 저버리는 이해타산적인 포지션으로 화하고는 하는데, 전략적인 포지션은 그 수준의 차가 있더라도 최대한 상생(win-win)하는 포지션과 관계가 되어야 한다. M&A 커뮤니케이션에서 전략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